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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생각

거시경제학의 아버지 케인즈 총정리2

by 생각의 열쇠 2022.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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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 프로필, 알아보아요!

케인스는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에서 1883년 6월 5일 출생하였다. 별칭은 케인스 경(The Lord Keynes)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1946년 4월 21일(향년 62세)의 나이에 잉글랜드 서식스 주 틸턴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이튼 칼리지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컬리지 수학과 학사를 졸업하였다. 국적은 영국으로 그는 직업에 있어서 다양한 직업을 가졌는데 직업은 경제학자, 철학자, 언론인 등을 역임하였다. 키는 198cm로 매우 큰 키에 속하였으며 그는 1925년 리디아 로포코바와 결혼하였으며 무종교이다. 그는 자유당의 입장이었는데 주요 경력으로는 베르사유 조약 체결 회담 영국 대표의 일원이었으며 파리 강화 회의 재무성 수석대표를 역임하였으며, 전후 국제 통화 제도 논의 핵심 멤버이자 차관 도입 협상 영국 측 대표, 왕립 인도 통화위원회 위원, 브레턴우즈 협정 영국 대표, 전후 국제 통화 제도 논의 핵심 멤버, 차관 도입 협상 영국 측 대표 등을 역임하였으며 잉글랜드 은행 이사이자 국제경제회의 영국 대표도 지냈다. 

거시경제학의 아버지 경제이론의 대가 케인즈

케인스의 생애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주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마거릿이라는 여동생과 제프리라는 남동생이 함께 자랐다. 경제학자였던 아버지 내비게이션을 케인(John Neville Keynes) 역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도덕과학 강의를 하였다. 그의 어머니 플로렌스 케인스(Florence Ada Keynes) 역시 지역의 사회개혁가로서 활동하였다. 케인스의 부모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많아서 그들은 자식들이 언제나 돌아와서 쉴 수 있도록 평생을 같은 집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케인스의 부모는 그들이 올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주의도 많이 기울였는데 케인스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를테면 케인스가 장학금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거나 케인스가 젊을 때 재정적 지원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특히 케인스가 1929년도에 대공황을 맞으면서 자산을 거의 잃었을 때도 존 네빌 케인스는 자식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격려하였다. 케인스의 어머니는 자신의 취미를 아이들에게 알려주기도 하였으며 유년기 시절 주로 집과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892년에 세인트 페이스(St Faith) 사립 초등학교의 학생이 되기 전에는 2년 동안 퍼스 스쿨 유치원(The Perse School nursery)에 다녔었다. 케인스의 학교 교사는 케인스가 똑똑하기는 하지만 종종 주의력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결정력이 부족한 아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는데 유년기 때는 좋지 못한 건강으로 인해 장기 결석을 하곤 하였다. 케인스는 1897년에 이튼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드러내게 된다. 특히 수학과 고전, 역사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 케인스는 이튼에서 해럴드 맥밀런(Harold Macmillan)과 그의 인생의 첫사랑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상대는 후에 영국의 총리가 되었다. 케인스는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긴 했어도 줄곧 상류층 학생들과 쉽게 어울리곤 했다. 1902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 수학 공부를 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사실 케인스는 철학에 큰 관심이 있었기에 조지 에드워드 무어(George Edward Moore)의 철학 체계에 영향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였던 앨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은 케인스에게 경제학자가 될 것을 권유한다. 케임브리지의 동아리 활동 격인 케임브리지 어포 쓸 수(동호회격인)에서 케인스는 뛰어난 학생들과 모여 논쟁을 펼치는 것을 즐겼으며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졸업 후에도 사도회에 유대감을 유지하여 평생 시간이 나면 클럽 모임에 나가곤 했다. 케인스가 케임브리지를 떠나기 전에 케임브리지 유니언 소사이어티(Cambridge Union Society)와 케임브리지 대학 문학 클럽의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을 정도다. 1904년 5월에는 수학으로 수석 졸업을 하며 학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는 졸업 후에도 대학에 나가 논쟁에 참여하였으며 철학을 공부하거나 경제학 강의를 듣고는 했다. 1905년엔 케임브리지 졸업시험인 Tripos와 1906년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케인스의 성격이 어땠길래?

그의 낙관적인 성향을 이해하고자 하려면 그의 유년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경제학자 해리 존(Harry Johnson)은 말했다. 그는 선한 일을 하는 공무원의 능력에 대해 굉장한 신뢰를 평생 가지기도 하였으며 언제나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어떤 문제도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케인스의 낙관적인 성향은 문화의 영향도 매우 크게 받았다고 보이는데 첫 번째 요인은 케인스가 영국의 절정에 오른 막강한 힘을 직접 본 마지막 세대였다는 것이며 두 번째로 케인스는 전문적 지식보다는 문화에 의해 통치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낀 마지막 세대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케인스의 주요 관심사, 케인스의 저서들

 케인스가 경제학에 대한 초기 관심을 주로 화폐나 외환 문제에 두었으나, 제1차 세계 때던 이후로는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고용과 생산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결정요인에 대해 고민하며 경제이론을 다시금 검토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대표적 저서인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1936'에서 와전 고용을 실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소비와 투자, 즉 유효수요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보완책인 공공지출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이 이론과 이 이론에 입각한 정책과 이 이론에 기반하는 사상의 개혁이 '케인스 혁명'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 밖에 케인스의 저서로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화폐 개혁론, 화해론을 비롯해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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